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쇠르너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히틀러와 쇠르너.webp|width=100%]] || || [[히틀러]]와 악수하는 쇠르너[* 오른쪽의 인물은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 [[율리우스 샤우브]]이다.] || [[빌헬름 카이텔]], [[헤르만 괴링]]과 더불어 독일군의 [[삼대오물]]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들 중 하나. 솔직히 여기서 카이텔이 삼대오물이라 불리기에는 급이 다른 이유가 비록 야전군인으로서는 무능할지 모르지만 자기 부하들에게는 '''[[덕장|정말로 최고의 상관이었고]]''' 심지어 그가 사형 선고를 받자 가장 먼저 항의한 사람들이 카이텔 휘하에서 근무한 장병들이었다. 아울러 카이텔은 조직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고위 장교들의 갈등을 수차례 중재하는 등 군인보다는 군 행정가, 고위 관료로서 더 유능한 사람이었다. 괴링은 공군 재건에 기여를 했고[* 사실 그냥 기여한 수준이 아니라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제정신일 때의 괴링은 살인적인 업무량을 감당해야 했다. 이외에도 괴링 스스로도 감투 욕심이 대단했기에 딱히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력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워커홀릭이었다.], 중공업과 무기생산 능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등, 고위 관료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으며 초반에만 해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면 쇠르너는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평가했을 때 전쟁 초기부터 정예 [[산악엽병]]부대를 지휘해오면서 나름 괜찮은 성과를 꾸준히 올려 오고는 있었지만 다른 걸출한 독일 장군들보다 비교적 평범한 축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질수록 점점 부하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희생을 강요한데다가 전쟁 최후반부에 임시긴 하지만 야전원수로 진급했으면서도 히틀러가 죽자 자신은 겁쟁이처럼 탈출하는 똥별같은 짓을 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독소전쟁 전까지 유능한 산악 지휘관으로서 전공을 세우고 독소전쟁 중에도 니코폴 방어전에서 제법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등 군사적 재능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때 후방에 있던 병사들을 이유 불문하고 죄다 탈영으로 몰아 목 매달라고 명령하여 휘하 장병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게다가 이런 쇠르너 때문에 빡친 장성들이나 영관급 장교들은 아예 모른척 부하들을 풀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대대장 이하 장교들은 아예 대놓고 무시했다.] 갈구고 욕하는 건 몹시 심하게 했으면서 칭찬은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보병장교 출신이자 쇠르너의 부관이었던 고틀로프 헤르베르트 비터만(Gottlob Herbert Bidermann)이 남긴 회고록 [[http://www.amazon.com/Deadly-Combat-Soldiers-Eastern-Paperback/dp/0700611223|In Deadly Combat: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에 의하면 장성,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만인에게 진심어린 증오를 사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여기까지만 했으면 당시 각국 군대에 흔해빠졌던 부하들을 갈아넣는 지휘관 1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빌헬름 카이텔]],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동급으로 나치당을 대놓고 추종하던 인간이었기에 정치 군인이라는 오명도 벗어날 수 없다. [[베를린 전투]] 당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대장도 전후 심문에서 쇠르너는 장성들 사이에서 강렬한 나치빠, 병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장성의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고 적당한 과오는 덮어주던 장성들끼리 이런 말 나올 정도면 그 아래의 장교들에게 평판이 얼마나 바닥이었을지는 짐작이 된다. [[http://skoblin.blogspot.in/2010/07/interrogation-record-of-general_03.html?m=1|출처]] 게다가 그렇게 [[똥군기]]를 강요하던 인간이 종국에는 사복 차림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히니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 도중 도망을 가거나 군복을 벗는 행위는 쇠르너가 엄연히 적전도주로 간주하여 [[즉결처분]]을 자주 집행하던 행위였는데, 정작 본인은 이러한 적전도주를 저지르고도 [[사형]]을 당하기는 커녕 수감생활 좀 하고 끝이었다. 그마저도 부하들을 잔인하게 다룬 죄는 잘해봐야 서독에서의 4년 형으로 끝이었으니, 언행일치도 제대로 하지 못한 [[막장]], [[모순]]덩어리. 그나마 반인륜 범죄와의 연관성은 적었기 때문에 소련의 전범재판 중에도 징역형을 다 살지 않고 중도 석방되었고, 서독 비나치화 재판에서도 수감생활을 오래 하지 않고 석방될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반인륜 범죄에 대해 논하자면 후방에 있던 부하들을 마구잡이로 즉결처형한 죄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독일 국방군에서 군법을 위반하여 처형당한 자들을 서독이라고 해서 구제한 것이 아니다. 쇠르너의 사례는 언제까지나 제대로 된 재판과 조사 없이 이뤄진 것과 사형당한 사람의 상당수가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국민돌격대]]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2007년 독일의 [[공영방송]] [[ZDF]]에서 방영한 5부작 다큐멘터리 의 최종화에서 페르디난트 쇠르너와 [[발터 모델]]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이때 쇠르너와 모델 휘하에서 장교로 근무했던 생존자들이 직접 출연하여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두 사람이 굉장히 상반된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쇠르너의 부하 장교들은 '쇠르너는 정치 군인이나 다름 없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충성도를 입증하기 위해 부하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라고 비판적인 진술로 일관하였으나 발터 모델의 부하 장교들은 '모델은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였으며 휘하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순수한 야전 군인으로 정치적인 견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군사적인 문제로 히틀러와 고함을 지르며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으며 히틀러가 자신의 의견을 꺾은 경우도 많았다.'고 진술했다.[* 애초에 둘의 최후도 전혀 달랐다. 쇠르너가 부하들에게는 싸우다 죽으라고 강요하고는 자기는 사복 입고 도망가다가 잡힌 반면, 모델은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할 게 분명해지자 국민돌격대나 히틀러 유겐트 등의 사실상 개죽음을 당할게 분명한 준 민간인들은 집단군사령관 직권으로 전부 전역시켜 집으로 돌려보냈고, 프로이센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관습을 지키기 위해 도망가지 않고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